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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공차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890
영어의미역 Kicking Ball made by Straw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놀이/놀이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집필자 남성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속놀이
노는 시기 겨울철

[정의]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서 두 편으로 나누어 골대를 정해 놓고 짚으로 만든 공을 차 넣는 놀이.

[개설]

짚공차기는 주로 남자아이들이 겨울철 논배미에서 짚으로 만든 공을 차고 노는 놀이이다. 남자아이들 혹은 어른들이 어울려서 두 편으로 가르고 가을철 수확기에 벼를 벤 텅 빈 마른 논배미에서 짚공을 축구공처럼 차고 노는 것이다. 짚공차기는 요즘의 축구와 같이 일정한 구역 안에서 양쪽에 골대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서로 공을 차서 많이 넣는 쪽이 이기는 놀이이다. 특별히 부르는 이름은 없고,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서는 동네 아이들이 ‘축구 차자.’ 하면 모여서 짚공을 차고 놀았다. 축구라는 말은 해방 이후에 나온 말이며, 1950년대 초에 많이 놀았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연원]

『후한서(後漢書)』의 고구려전(高句麗傳)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축국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1세기에서 늦어도 3세기 전에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축국은 원래 공차기를 포함하여 공놀이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한 용어였다. 축국은 하는 방식에 따라 양 끝에 구멍을 파놓고 공을 넣거나 놀이터 양쪽에 설치된 공문에 공을 넣는 형태, 그리고 오늘날 제기차기와 같은 형태가 있다.

이러한 축국은 신라 시대에서도 나타나는데, 화랑들의 역사를 기록한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에 따르면 6세기 초 신라에서 축국이 시행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김춘추(金春秋)[604~661]가 김유신(金庾信)[595~673]과 함께 농주를 가지고 노는 축국을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고려 시대에도 역시 축국에 관련된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아이들이 동네에서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고 가죽으로 감싼 공인 기구(氣毬)를 차고 놀았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고려 시대에 축국이 민간을 중심으로 성행했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축국은 도시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돼지 오줌보로 공을 만드는 것 이외에 농촌에서는 추수를 한 후에 짚으로 만들어 차기도 하였다. 농경 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짚을 이용한 여러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공을 짚으로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이 짚공차기의 연원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축국은 조선 말기까지 겨울철 세시 풍속으로 가장 신나는 아이들의 놀이였다. 그러나 19세기 말 서양의 근대식 축구가 도입되면서 공을 이용한 전래 형식의 축국은 점차 사라져 갔다.

[놀이 도구 및 장소]

짚공차기의 놀이 도구는 역시 둥글게 만든 ‘짚공’이다. 짚공은 새끼를 가늘게 꼬아 둥글게 망을 짜고 그 속에 짚을 넣어 만든 것이다. 짚을 넣고 겉을 단단히 얽어매면 안에 있는 내용물이 밖으로 나오지 않고, 맨발로 공을 차도 아프지 않다. 짚공차기의 놀이 장소는 주로 논배미를 활용하여 놀거나 공터, 또는 골목길을 이용하였다. 여기에 짚공을 차서 넣을 수 있도록 구멍을 짚으로 엮어 만들거나 적당한 목표물을 설치해 두고 그것을 맞추기도 한다. 때로는 설치물 없이 흙바닥에 금을 그어 공을 차 넣을 수 있도록 놀이 장소를 설정하여 두기도 한다.

[놀이 방법]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경우를 보면, 놀이 방식으로는 먼저 양편으로 갈라 사람 수를 정한다. 특별히 몇 명이라고 정해진 것은 없으나 양편을 공평하게 나누고 문잽이[문지기]를 세운다. 다음에 논바닥에 금을 그려 놓고 거기에 문잽이가 지키고 선다. 딱히 입체식 골대나 돌 더미 등을 설치하는 것은 아니고 뺑 돌려 금만 그려놓고 놀았다. 그리고 놀이판의 중앙에도 꼬챙이를 가지고 요즈음의 축구장처럼 금을 그려 둔다.

문잽이는 공을 잡을 수 있으며, 대체로 문만 지키고 서 있다. 짚공이 놀이터의 금 밖으로 나가면 다시 한다. 이때 심판은 따로 없고 공이 골문 안으로 들어가면 점수를 따게 된다. 그러다 보면 격렬히 놀게 되어 싸움도 하고 코피도 터지며 난장판이 된다. 문잽이만 손으로 공을 잡을 수 있고 나머지는 발로만 짚공을 차고 놀았다. 짚공차기는 경기 시간을 특별히 정하지 않았으며, 무진장 놀면서 공을 많이 넣는 편이 이기는 경기이다. 그러다 보니 이쪽저쪽 골문을 바꿔가며 경기를 하지는 않고 놀다가 저녁밥 때가 되든지 저물게 되면 놀이를 마무리하였다.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는 한쪽 땅바닥에 작대기로 넣는 숫자만큼 금을 그을 때도 있고, 작은 돌멩이를 점수가 난 만큼 갖다 놓는 경우가 있다. 보통 열댓 살 아이들이 노는 놀이인데, 그보다 더 어린 아이들은 위의 형들이 만들어 준 짚공을 가지고 그들대로 놀았다. 때로는 열댓 살 먹은 아이들이 동생들을 불러다가 짚공차기 싸움을 붙이기도 하였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가을걷이가 끝나면 그때부터 논바닥은 아이들 차지가 된다. 스스로 만든 짚공을 추운 줄도 모르고 한겨울 내내 뛰어다니며 즐긴다. 놀잇감을 비롯하여 놀이터 조성과 편을 가르는 방식, 또는 짚공차기의 규칙까지도 아이들 스스로 만들면서 나름의 사회성을 키워 간다. 요즘같이 특별한 놀이가 없던 시절에 아이들은 종일 논바닥에서 짚공을 차면서 몸과 마음을 다스렸고, 어른들은 아이들이 뛰노는 논바닥을 보고 새로운 해의 풍년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현황]

요즘은 잃어버린 옛 놀이의 한 가지인 짚공차기를 다시 되살려 축제화하거나 체험프로그램으로 활용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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