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0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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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讀雙磎寺碑-南孝溫- |
영어의미역 | Reading Ssanggyesa Temple Monument by Nam Hyoon |
이칭/별칭 | 「쌍계사 비문을 읽고」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석기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4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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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492년 |
배경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
성격 | 한시|서정시|칠언 고시 |
작가 | 남효온(南孝溫)[1454~1492] |
[정의]
1487년 추강 남효온이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를 보고 지은 한시.
[개설]
「독쌍계사비(讀雙磎寺碑)」는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추강집(秋江集)』 권2에 수록되어 있다. 남효온은 1487년(성종 18) 9월 27일부터 10월 13일까지 약 보름 동안 지리산[1,915m]을 두루 유람하였다. 10월 9일 전라남도 구례를 떠나 경상남도 화개로 들어가서 쌍계사(雙磎寺)에 이르렀는데, 「독쌍계사비」는 아마도 그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남효온의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여창(鄭汝昌)[1450~1504]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사에 얽매이지 않았다.
1478년(성종 9) 성종이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살의 나이로 장문의 소를 올려 첫째, 지방의 수령을 가려 보내 민폐를 제거할 것, 둘째, 인재 등용을 신중히 하고, 셋째, 산림의 유일(遺逸)도 등용할 것, 넷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할 것, 다섯째 불교와 무당을 배척할 것, 여섯째 학교 교육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 8가지를 건의하였다. 소릉 복위는 세조의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부정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한 제안이었다. 이 때문에 훈구파의 심한 반발을 샀다.
남효온은 이 뒤로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깔보면서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 세상사를 비판하였다. 전국의 명승을 두루 떠돌아 남효온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1417~1456], 성삼문(成三問)[1418~1456], 하위지(河緯地)[1412~1456], 이개(李塏)[1417~1456], 유성원(柳誠源)[?~1456], 유응부(兪應孚)[?~1456] 등 6명이 단종을 위하여 순절한 내용을 다룬 「육신전(六臣傳)」을 저술하였다.
남효온이 죽은 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소릉 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훈구파에 의해 부관참시 당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1392~1480], 김시습(金時習)[1435~1493], 조여(趙旅)[1420~1489], 성담수(成耼壽)[?~1456] 등과 함께 남효온을 생육신이라 불렀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추강집』, 『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귀신론(鬼神論)』 등이 있다.
[구성]
30구로 된 장편 칠언 고시이다. 앞의 4구는 쌍계사에 이르러 최치원(崔致遠)[857~915]이 직접 짓고 쓴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를 어루만지며 감개무량해 하는 마음을 서술하였다.
그 다음에 최치원이 당나라에 들어가 문명을 떨친 점,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뜻을 얻지 못하고 신선 세계에 몸을 의탁한 점을 길게 노래하였다. 그리고 왕명으로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를 지은 것에 대해 유자(儒者)로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774~850]를 찬양한 점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이는 시인의 평소 정신세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 다음으로 최치원이 우리나라 문학의 시조인 점, 문장은 변려문으로 조탁을 한 점, 글씨가 빼어난 점 등을 기술한 뒤 끝으로 최치원을 그리워하는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내용]
동우성설공산한(凍雨成雪空山寒)[내리던 비 눈이 되어 황량한 산간 싸늘한데]
마사석각고운수(摩挲石刻孤雲手)[비석에 새겨진 최고운의 필적을 어루만지네]
고운거후육백년(孤雲去後六百年)[고운 선생 떠난 지 육백 년이 흘렀으니]
유부호사귀물수(幼婦好辭鬼物守)[절묘하고 좋은 문장 귀신들이 지켜 주었네]
십이부급입대당(十二負笈入大唐)[열두 살에 책을 지고 당나라 들어가서]
곤산편옥극신후(崑山片玉郤侁後)[곤륜산 옥이라 자부한 극선의 뒤이었네]
황소일격송천하(黃巢一檄誦天下)[황소에게 보낸 격문 온 천하에 암송되고]
한림고명동구유(翰林高名動九有)[한림학사 높은 명성 중국 천지에 진동했네]
황웅성중자부고(黃熊聲中紫府高)[황웅의 울음 속에 신선 세계 높기만 한데]
말로원종류가구(末路願從劉家狗)[말년에는 유씨네 개처럼 신선되길 원했네]
정중일월이동궁(鼎中日月已同宮)[단약 달이며 보낸 세월 이미 선계와 같았고]
신위하건사불구(神闈下楗事不苟)[신선 세계 닫혀 있어 일이 구차하지 않았는데]
호위재봉계림교(胡爲再奉鷄林敎)[무엇하러 신라 조정의 교지를 다시 받들어]
소록인간일용수(疏錄人間一庸叟)[인간 세상 평범한 한 노승의 사적을 기술했나]
축상념불망용사(祝上念佛妄庸事)[축원하고 염불함은 어리석은 일이거늘]
은근찬탄불용구(慇懃讚嘆不容口)[은근히 찬양한 말이 입에 넘쳐흘렀네]
혜소사적불욕관(慧昭事跡不欲觀)[혜소의 사실과 행적은 내 보고 싶지 않고]
단경세근룡사주(但驚細筋龍蛇走)[용처럼 꿈틀대는 가는 글씨에 경탄할 뿐]
문여리백차단련(文如李白差鍛鍊)[문장은 이태백의 글처럼 조금 단련을 했고]
서득백영취중취(書得伯英醉中趣)[글씨는 백영처럼 취중의 정취를 얻었네]
차방문자자공시(此邦文字自公始)[이 나라 문장이 공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청구학사공위수(靑丘學士公爲首)[우리나라 학사 가운데 공이 으뜸이로세]
팔영루평장죽간(八詠樓平長竹竿)[팔영루는 평평한데 대나무 줄기는 길쭉하고]
중정낙엽일슬후(中庭落葉一膝厚)[뜰 안에 떨어진 낙엽은 무릎까지 쌓였구나]
청학고비고연공(靑鶴高飛故淵空)[청학은 높이 날아가 옛 연못은 비었는데]
쌍계석풍초림망(雙溪夕風抄林莽)[쌍계의 저녁 바람이 나무숲을 스쳐가네]
오가문장비장재(吾家文章非長才)[나의 문장 솜씨는 훌륭한 재능이 아닌지라]
찬인공교졸구부(讚人工巧拙鳩婦)[남의 문장 칭찬하기엔 서툴기 그지없네]
승운공덕불가묵(僧云公德不可默)[공의 덕에 침묵할 수 없다는 승려의 말에]
강위각화무염추(強爲刻畫無鹽醜)[더없이 보잘것없는 글을 억지로 짓는다네]
제9구의 ‘황웅(黃熊)’은 요임금 때 곤(鯀)이 죽어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누런 곰’이고, ‘자부(紫府)’는 신선 세계이다. 제10구의 ‘유가구(劉家狗)’는 한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B.C.179~B.C.122]이 단약을 먹고 대낮에 승천하였는데, 그 집의 개와 닭이 유안이 먹고 남은 약을 핥아 먹고서 뒤따라 승천하여 닭은 천상에서 울고 개는 구름 속에서 짖었다고 한 고사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그와 같이 신선이 되고자 하였다는 뜻으로 쓰였다.
[의의와 평가]
「독쌍계사비」는 남효온이 최치원을 우리나라 문학의 비조(鼻祖)로 존경하면서 최치원이 남긴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의 문장과 글씨, 그리고 최치원의 삶에 대해 소회를 읊은 한시이다. 남효온은 최치원을 문학가로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추숭하면서도 불교에 대해 관대하였던 점을 비판하고 있으며, 문장이 변려문의 화려한 수사에 치중한 점을 은근히 못마땅해 하고 있다. 그러나 최치원에 대한 감회를 금치 못하고 그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정서를 유감없이 표출하고 있다.
최치원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조선 전기 사림파 지식인의 인식이 잘 드러나는 칠언 고시로, 남효온이 최치원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