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0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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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豆巵津-丁若鏞- |
영어의미역 | Duchijin Dock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석기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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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36년 |
배경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
성격 | 한시|기행시|칠언 고시 |
작가 | 정약용(丁若鏞)[1762~1836] |
[정의]
1780년경 다산 정약용이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의 두치진 시장 풍경을 읊은 한시.
[개설]
「두치진(豆巵津)」은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시문집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1집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정약용은 17살 때인 1778년(정조 2) 부친 정재원(丁載遠)이 화순현감(和順縣監)으로 나갔을 때 그곳으로 가 인근 동림사(東林寺)에서 글을 읽었다. 또 1780년(정조 4) 장인 홍화보(洪和輔)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서 진주에 있었을 때 아내 홍씨와 함께 전라남도 광양과 경상남도 하동을 거쳐 진주로 가서 장인을 찾아뵈었다.
「두치진」은 이때 지은 한시로, 19살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정약용은 시의 맨 뒤에 “청학동은 지리산에 있다. 이때 나는 아내를 데리고 있었으므로 명승을 구경할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를 통하여 정약용이 19살 때 아내를 데리고 전라남도 광양을 거쳐 경상남도 진주로 간 것을 확인할 수 있으니, 그 당시 두치진에 당도한 듯하다. 그러므로 「두치진」은 정약용이 화순에서 광양을 거쳐 진주로 갈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구성]
14구로 구성된 칠언 고시로, 하동 읍치 10리 지점에 있는 두치진이 해양과 내륙의 물산이 모여 교역을 하는 큰 시장이라는 점, 활력이 넘치는 장터 풍경, 이익에만 골몰하는 세간 인정에 대한 은근한 풍자, 신선 세계로 알려진 청학동에 가 보지 못하는 아쉬움 등을 말하고 있다. 전반부는 두치진 장터의 풍경을 핍진하게 묘사하였고, 중반부에서는 두치진이 해양 교역의 중심지임을 서술하였으며, 후반부에서는 이익만을 탐하는 세태를 풍자하며 청학동을 가 보고 싶어 하는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
[내용]
명추인경흔출곡(鳴騶引頸欣出谷)[마부는 목을 빼고 기쁘게 골짜기를 빠져나오니]
야도주횡춘수록(野渡舟橫春水綠)[배는 나루에 옆으로 늘어섰고 봄 강은 푸르네]
사평일난시초집(沙平日煖市初集)[백사장 따사로운 햇살에 이제 장이 막 서는데]
만조연생라주육(萬竈煙生羅酒肉)[장터 주점엔 연기 오르고 술과 고기 진열했네]
안변우마교상희(岸邊牛馬交相戲)[언덕에 맨 소와 말은 서로 어울려 장난질하고]
포구범장삼사속(浦口帆檣森似束)[포구에 모인 범선 돛대 꾸러미처럼 줄지어 섰네]
서통대방북사벌(西通帶方北沙伐)[서쪽으론 남원 북쪽으론 상주와 통해]
호상대고어사족(豪商大賈於斯簇)[온 나라 거상들이 이곳에 다 모였구나]
송경애주전금기(松京愛州轉錦綺)[개성과 안남의 비단이 거치고 거쳐 들어오고]
울릉탁라수어복(鬱陵乇羅輸魚鰒)[울릉도 제주도의 생선이 바닷길로 수송되네]
양양왕래총위리(穰穰往來摠爲利)[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모두가 이익 때문이니]
수능만세도이목(誰能挽世塗耳目)[이목의 물욕에 어두운 세태 누가 능히 돌리리]
회간남악쇄연무(回看南嶽鎖煙霧)[고개 돌려 돌아보니 지리산은 운무 속에 잠겼고]
청학고비묘난축(靑鶴高飛杳難逐)[청학은 높이 날아 묘연하니 쫓아가기 어렵구나]
청학동재지리산 시인영내불능력람(靑鶴洞在智異山 時因領內不能歷覽)[청학동은 지리산에 있다. 나는 당시 아내를 데리고 있었으므로 명승을 유람할 수 없었다]
[특징]
제2구에 ‘녹(綠)’, 제4구에 ‘육(肉)’, 제6구에 ‘속(束)’, 제8구에 ‘족(簇)’, 제10구에 ‘복(鰒)’, 제12구에 ‘목(目)’, 제14구에 ‘축(逐)’의 운자를 썼다.
[의의와 평가]
「두치진」은 하동군의 두치진 시장 풍경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실감나게 그려 낸 한시이다. 정약용이 젊은 시절에 지은 한시라는 점에서 정약용의 청년기 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두치진은 예전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섬진강의 나루터로 큰 장이 서던 곳이다. 두치진이 현재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정약용이 하동부 읍치에서 10리 지점에 있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화개장터로 보는 설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치진은 하동과 광양을 연결하는 주요 나루터로 하동군 하동읍 북쪽 10리 지점의 만지마을을 가리키는 듯하다. 만지마을에는 백사장이 있어 정약용의 시와 일치하며, 큰 시장이 설 만큼 충분히 넓다. 그 건너편이 광양군 다압면으로 섬진나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