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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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來洪 |
영어음역 | Park Rae Hong |
이칭/별칭 | 박중래(朴重來)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603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숙향 |
출생 시기/일시 | 1892년 10월 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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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1월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6월 10일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5월 |
몰년 시기/일시 | 1937년 6월 28일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603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밀양(密陽). 박중래(朴重來)로도 불린다. 아버지는 한의사로 활동한 박준형(朴準亨)이고 어머니는 신상남(申相南)이다. 부인은 영산 신씨(靈山 辛氏)로, 슬하에 딸 박기남을 두었으며 사위는 김금용이다. 외손자부는 전 환경부장관이자 연극배우인 손숙(孫淑)이다.
[활동 사항]
박내홍(朴來洪)은 1892년(고종 29) 10월 7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603번지에서 태어났다. 하동군 양보면에 있는 한문 사숙에서 『천자문(千字文)』과 『명심보감(明心寶鑑)』을 배워 학문의 기초를 다지고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을 배워 학문의 뿌리를 굳건히 세웠다. 박중래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항일 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1919년 3월 전국에서 만세 소리가 진동하자 일생을 항일 투쟁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국의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성립되자 당시 62세이던 기원필(奇元必)과 상해 임시 정부에 대한 지원 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군자금 수합에 나섰다. 박내홍 등은 우선 기원필의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시작했다.
군자금 수합에 나선 애국지사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서로 암호로 통신 연락을 주고받으며 상해 임시 정부 발행의 공채 증권(公債證券)을 발부하는 등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한 후 서울과 남원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박내홍은 1920년 11월 우체국에서 기원필에게 1천 원권 공채 증권 1장과 1백 원권 공채 증권 2장을 발송하다가 이를 수상하게 여긴 우체국 직원이 신고하여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일본 경찰이 배후를 밝히라고 요구하며 각종 고문을 자행했으나, 박내홍은 조국을 되찾겠다는 욕심에서 상해 임시 정부를 도우려고 했을 뿐이라며 구체적인 내용은 실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본 경찰에 검거된 지 7개월 만인 1921년 6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곧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1일 경성복심법원[서울고등법원에 해당]에서 기각되어 1년형이 그대로 확정되면서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2년 봄에 출옥한 박내홍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고 투쟁을 계속하다가 1935년 5월 또다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때 고등계 형사에게 붙잡혀 거의 죽게 될 지경이 되도록 각종 고문에 시달렸고, 이 해 7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죄 처벌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언도 받아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 동안 옥중에서 고생하였다.
박내홍은 1919년 3·1 운동 대열에 서서 만세를 부를 때부터 1936년 출옥할 때까지 17년간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동분서주 고생하다 마침내 고문 후유증과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인해 출옥 1년 만에 순국하였다.
[묘소]
묘소는 원래 전라남도 목포시 산정동 천주교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2000년 10월 19일 국립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어 부인 신범사와 함께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