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214 |
---|---|
한자 | 金碩垢 |
영어음역 | Gim Seokg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병철 |
[정의]
조선 후기 하동 출신의 공신.
[활동 사항]
숙종 말년 소론은 세자[훗날의 경종]의 왕위 계승을 지지한 반면, 노론은 경종이 즉위한 뒤 숙종의 유명(遺命)이라는 이유로 경종의 뒤를 이을 인물로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지지하였다. 특히 경종이 젊은데도 노론 측이 경종이 병이 많고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연잉군의 세제 책봉과 대리 청정을 서두르자, 소론은 경종의 보호를 명분으로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왕위를 계승하자 신임사화의 옥사를 문책하게 되면서 노론의 지위는 회복되었다.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지위가 위협받자 박필현(朴弼顯), 이유익(李有翼), 심유현(沈維賢) 등 소론 인사들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의 제거를 계획하였다. 그 명분으로 경종이 영조에게 독살되었다는 의혹과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워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密豊君)[소현세자의 증손]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당인들을 결속시키고 그들의 모반을 정당화하였으며, 또한 민심을 규합하는 데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1728년 3월 15일 이인좌(李麟佐)가 이끄는 반군이 충청감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李鳳祥), 영장 남연년(南延年), 군관 홍림(洪霖)을 살해하고 청주를 장악한 뒤 권서봉(權瑞鳳)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하여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나누어 주었다. 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해 조석으로 곡배하였다.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도 이에 호응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이인좌의 난’이며,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본관이 김해(金海)인 김석구(金碩垢)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선전관으로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선전관으로서 영조를 호위한 공을 인정받아 난이 평정된 후 양무원종 일등공신(揚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고, 어모장군 전라우후(禦侮將軍全羅虞侯)에 임명되었다. 후에 금부도사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