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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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遊頭流續錄-申命耉- |
영어의미역 | Follow-up Record of Sightseeing at Duryusan Mountai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강정화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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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42년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20년 |
성격 | 한문학|유람록 |
작가 | 신명구(申命耉)[1666~1742] |
[정의]
1720년 남계 신명구가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과 신흥동을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유두류속록(遊頭流續錄)」은 신명구(申命耉)[1666~1742]의 『남계집(南溪集)』 권3에 수록되어 있다. 신명구는 1720년(숙종 46) 4월 6일부터 4월 14일까지 9일 동안 경상남도 하동과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였다. 이보다 한 해 전인 1719년(숙종 45) 5월 16일부터 5월 21일까지 6일 동안 자신의 거주지인 산청 덕산을 출발해 덕산사와 무위암을 거쳐 중산리까지 갔다가 귀가하는 일정으로 유람하였는데, 이때의 기록이 「유두류일록(遊頭流日錄)」이다. 이후 지리산[1,915m] 이남 지역을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에 하동군의 청학동으로 유람을 계획하고 실행하여, 그 감상을 「유두류속록」으로 기록하였다. 「유두류속록」이란 제목은 전년도 유람의 속편이라는 뜻으로 붙였다. 동행은 윤백이, 조영하, 황재헌, 하성일, 권이경이다.
신명구의 자는 국수(國叟), 호는 남계(南溪),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고려 태조를 도와 건국에 공을 세웠던 신숭겸(申崇謙)[?~927]의 후손으로, 조부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에게 수학하여 덕망이 높았던 신후덕(申厚德)이다. 1666년(현종 7) 12월 15일 경상북도 인동(仁同) 약목리(若木里)에서 태어났다. 1691년(숙종 17) 문과에 낙방한 이후 지리산 아래에 집을 짓고는 덕천을 왕래하며 조식(曺植)[1501~1572]의 유풍을 접하였고, 1717년(숙종 43) 덕산으로 옮겨와 살았다.
신명구가 지리산에 기거한 기간은 대략 10년이다. 부친이 당한 억울한 사건으로 인해 세상사에 회의를 느꼈고, 이후 누명을 벗기는 하였지만 끝내 출사하지 않고 세상을 피해 살았다. 만년에는 고향인 경상북도 인동 약목리로 돌아가 두계(杜溪) 가에 정사를 짓고 후학을 교육하며 살았다. 『남계집』에는 지리산 유람을 통해 지은 많은 시들이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덕산에 기거하는 동안 단속사(斷俗寺)와 단성(丹城)의 적벽(赤壁) 등 인근 지역을 두루 유람하며 지은 작품이 다수 전한다.
[구성]
유람 일정에 따라 시간별로 산문과 한시를 섞어 기록하고 있다. 신명구는 덕산을 출발하여 하동 횡보→영계서원(永溪書院)→하동→삽암(鈒巖)→취적대(取適臺)→악양정(岳陽亭)→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신흥사(新興寺)를 구경하고 하동으로 돌아 나와 귀가하는 일정으로 유람하였다. 접하는 유적지에 대해서는 역사적 변천은 물론 현재의 보전 상태, 관련 사항 및 주변 경관 등을 소상하게 나열하고 있다.
[내용]
4월 6일: 출발.
4월 7일: 하동 횡보에 들러 정여창(鄭汝昌)[1450~1504]의 위패를 모신 영계서원을 둘러보았다. 그 앞으로 흐르는 시내에 물고기가 많았다.
4월 8일: 섬진강가 통제영에 있는 하동의 신읍치(新邑治)에 들러, 그 위용을 두고서 영호남 제일의 요새라 칭송하였다. 하동군 악양의 여러 유적인 동정호·군산(君山)·평사(平沙)·소상(瀟湘)·악양루 터를 구경하였다. 삽암 위 취적대와 관련한 기록이 보인다.
악양정에 들러 정여창이 김일손(金馹孫)[1464~1498]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고 하동 동정호에 들러 읊었던 시를 읊조리며 정여창과 김일손의 삶을 회고하였다. 신명구는 정여창을 모신 서원을 악양정 터에 세우지 않고 영계마을에 세운 것에 대해 개탄하였다. 쌍계사에 들러서는 수많은 유적을 남긴 최치원(崔致遠)[857~?]의 시를 읊으며 그 빼어난 경관에 감탄하였다. 밤새 두견새 울음소리만이 들리는 달 밝은 밤에 날이 새도록 정신이 맑고 시원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4월 9일: 불일암을 올랐다. 불일암으로 오르는 험준한 길을 두고서 천명을 아는 자가 갈 곳이 아니라 하였다. 청학동의 청학에 대한 일화를 전하고 있다. 속세에서 온 어떤 사람이 청학동에 살고 있던 청학에게 화살을 쏘았는데, 그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불일암에서 묵언 수행을 하는 승려의 생활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승려들은 관찰사가 방문하더라도 일어나지 않고 물어보아도 응답하지 않으며, 솔잎으로 만든 죽을 매일 정오에만 한 그릇씩 먹는다고 하였다.
신명구는 신흥동 계곡을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이상향과 유사하다고 인식하여, 신흥동 계곡에서 남은 생을 살고 싶다 토로하였다. 밤에 신흥사 앞 계곡의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한시를 읊었으며, 마치 양쪽 겨드랑이에 바람이 일면서 날개가 생겨 신선이 될 것만 같다고 하였다. 또 지리산의 경관 가운데 청학동, 삼신동, 칠불암이 가장 빼어나다고 칭송하였다.
4월 10일: 비가 내려 신흥사에서 발이 묶였다.
4월 11일: 날은 개었지만 개울물이 불어나 칠불암 구경을 포기하고 귀갓길에 올랐다.
[의의와 평가]
「유두류속록」은 18세기 경상우도 지역에 은거하였던 재야 지식인이 하동의 청학동을 유람하고 지은 작품으로, 재야 지식인에게 이상향으로 인식된 지리산 청학동과 신흥동의 진면목을 잘 표현한 작품 중 하나이다. 탁월한 문장력, 섬세한 관찰력, 풍부한 감수성, 그리고 이상향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 등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신명구가 일생 재야에 은거하였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시정의 폐단을 비판하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