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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류산록」[유몽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86
한자 遊頭流山錄-柳夢寅-
영어의미역 Record of Sightseeing at Duryusan Mounta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정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59년연표보기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23년연표보기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611년연표보기
배경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범왕리지도보기
성격 한시|유람록
작가 유몽인(柳夢寅)[1559~1623]

[정의]

1611년 어우당 유몽인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지리산 천왕봉 을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어우집(於于集)』 권6에 수록되어 있다. 유몽인은 1611년(광해군 3) 3월 29일부터 4월 8일까지 9일간 지리산[1,915m] 천왕봉과 하동군의 청학동을 유람하였다.

유몽인의 자는 응문(應文), 호는 어우당(於于堂)·묵호자(黙好子),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성혼(成渾)[1535~1598]과 신호(申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89년(선조 22)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611년 남원부사로 부임하였을 때 지리산을 유람하고서 유람록인 「유두류산록」과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이 중 장편시 「유두류산백운(遊頭流山百韻)」이 유명하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뒤 광해군의 복위에 가담하였다는 무고로 사형을 당하였다. 저술로 『어우집』, 『어우야담(於于野譚)』 등이 있다.

[구성]

유람록은 ‘유람의 동기→일정별 유람 기록→유람의 총평[후기]’ 등 유람에 따른 시간적 기록의 총칭이다. 「유두류산록」은 이러한 형식에 맞춰진 유람 기록으로, 일기체 형식의 산문으로 되어 있다.

유몽인은 남원부사로 부임한 1611년 인근의 순천 지역 수령인 유영순(柳永詢)[1552~1630] 등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였다. 유람 일정을 살펴보면, 남원 관아를 출발하여 운봉→함양 영원암→군자사→쑥밭재→천왕봉→세석평전→영신암→의신사(義神寺)→신흥사(新興寺)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화개→구례를 거쳐 귀가하였다. 지리산 유람은 주로 천왕봉을 등정하거나 이상향인 청학동을 찾아가는 것으로 양분할 수 있는데, 유몽인은 이 둘을 모두 겸한 유람이었다.

함양에서 천왕봉을 오르는 코스는 함양 군자사와 용유담(龍游潭)을 거쳐 곧장 천왕봉에 오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유몽인지리산의 동쪽 권역인 쑥밭재와 중봉, 하봉을 거쳐 천왕봉에 올랐다. 일행이 하동 땅에 도착해 유람한 일정은 유람 6일째인 1611년 4월 5일부터 4월 7일까지이다.

[내용]

4월 5일: 유몽인 일행은 천왕봉에서 영신봉을 지나 하동 화개의 의신암에 도착해 묵었다. 이 지역에서 이름난 시승(詩僧)인 옥정(玉井), 각성(覺性)[1575~1660]과 함께 시를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특히 승려 각성은 이 시기 전후의 지리산 유람록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주로 신흥사에서 수많은 젊은 학승들을 가르치는 고승이었다.

4월 6일: 홍류동으로 들어가 신흥사에 닿았다. 홍류동은 신흥사 터가 있는 삼신동(三神洞) 골짜기를 말하는데, 신흥동 계곡으로도 알려져 있다. ‘삼신동’이란 명칭은 이 골짜기에 영신사(靈神寺)와 의신사, 신흥사 등 ‘신(神)’자가 들어가는 세 사찰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쌍계사 석문(雙磎寺 石門)을 거쳐 쌍계사에 도착해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최치원(崔致遠)[857~?]과 관련한 여러 유적들을 구경하였다.

4월 7일: 불일암청학동 일대를 유람하려 하였다. 유몽인불일암 일대를 청학동으로 인식하였다. 유영순 등 여타 일행들은 이전에 본 것이라 하여 마다하고 돌아갔다. 불일암완폭대(玩瀑臺), 불일폭포 등을 유람하였고, 그곳 승려의 소개로 청학이 사는 둥지를 보았다.

특히 불일폭포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그 길이에 있어서는 송도의 박연폭포보다 낫지만, 걸림 없이 물이 곧장 떨어지는 모습은 박연폭포만 못하다고 하였다. 불일폭포에 대해 “하늘의 띠가 아래로 드리운 듯 폭포가 쏟아져 온 골짜기가 우레 치는 듯 요란하고, 붉은 빛깔을 띤 안개와 흰 눈 같이 하얀 물방울이 골짜기 안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사람의 귀를 놀라게 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하여, 정신이 상쾌해졌다. 이날의 기이한 구경은 참으로 평생 다시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는 말로써 그 감회를 피력하였다.

[특징]

유몽인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답게 지리산 곳곳의 경관을 아름다운 문장력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또한 지리산 내 수많은 사찰을 두고서 유학자적 사고(思考)와 비판을 유감없이 표출하였다. 특히 발길 닿는 곳의 수많은 유적지 명칭에 대해 나름의 해석을 덧붙였는데, 그 설명이 독창적이다. 예컨대 신라 시대 화랑(花郞)인 영랑의 무리를 일컫는 것으로 알려진 소년대(少年臺)를 두고서, 천왕봉은 장로(長老)이고, 소년대는 장로를 받들고 있는 소년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였다.

[의의와 평가]

「유두류산록」에는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인 지리산에 대한 조선 시대 선비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수록되어 있다. 유몽인은 우리나라 모든 명산과 명승을 유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중국을 세 번이나 다녀와 요동에서부터 베이징까지 두루 둘러본 인물이다. 그런 유몽인이 우리나라의 산천 중 지리산이 최고라 하였다.

특히 유람록의 말미에 붙여진 유람 총평에서 유몽인은, 지리산을 문장에 비유하자면 굴원(屈原)[B.C.343?~B.C.277?]과 이사(李斯)[?~B.C.208]와 가의(賈誼)[B.C.200~B.C.168]와 사마상여(司馬相如)[B.C.179?~B.C.117]와 양웅(揚雄)[B.C.53~A.D.18]의 장점을 모두 겸비한 사마천(司馬遷)[B.C.145?~B.C.86?]의 글에 해당하고, 시에 비유하자면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맹호연(孟浩然)[689~740]과 위응물(韋應物)[737~804?]과 왕유(王維)[699?~?761]와 가도(賈島)[779?~843]와 이상은(李商隱)[812~858]의 장점을 모두 겸비한 시성(詩聖) 두보(杜甫)[712~770]의 시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지리산을 우리나라는 물론 천하의 그 어떤 명산에도 비견되지 않는 산으로 인식한 유몽인의 자긍심은, 지리산지리산 유람과 관련하여 조선 시대 지식인의 인식 체계를 살피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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