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6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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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寺址 |
영어의미역 | Temple Si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박용국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에 있는 절 터.
[개설]
하동 지역의 사지로는 신흥사지(新興寺址), 봉상사지(奉常寺址), 이명산(理名山) 석불사지(石佛寺址), 청룡리 사지(寺址) 등이 전해 오고 있다. 이외에 유물은 전하지만 정확히 그 사지가 알려져 있지 않거나 사명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각종 지리지에는 하동현의 여러 사찰이 전하고 있으나 현재 지명이나 유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하동 지역에 존재했을 사암(寺庵)의 수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현재 알려진 사지와 유물로서 어느 정도 사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사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신흥사지]
신흥사지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51-1번지 일대에 해당한다. 신흥사는 화개동천 삼신동(三神洞)의 선경에 자리를 잡고 있어 조선 시대 지리산 유람에 나선 선비들이 들러서 묵고 갔던 절이었다. 『진양지(晉陽誌)』 사찰조에 보면 신흥사는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이후 중창되었다고 한다. 근대 이후 쇠퇴하다가 6·25 전쟁 때 완전히 폐사되었던 절일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0, 경상도 진주목의 불우조에 신흥사는 지리산에 있다고 하였으며, 일찍이 고려 중기 이인로(李仁老)는 화엄사를 거쳐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서 유숙하였다. 이인로는 이곳을 지나면서 선경 아닌 곳이 없다고 하였다.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은 1489년(성종 20) 8월 14일 덕봉사(德峯寺)의 승려 해공(解空)의 안내를 받아 지리산 유람에 나섰고, 17일[신사] 신흥사 골짜기에 이르러 해공이 일러 “여러 산골짜기가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장영기는 개나 쥐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략과 용맹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 탄식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봉상사지]
봉상사지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 원탑마을 734-2번지 일대에 해당한다. 봉상사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 원탑마을 734-2번지 일대에 있었던 통일 신라 시대 사찰이었다. 이곳에 흩어져 있던 탑의 부재들을 모아 다시 세운 통일 신라 시대 삼층석탑은 현재 하동군 화개면 탑리 742번지 화개우체국 내에 있다. 봉상사지는 이 탑리 삼층석탑으로 인해서 그 사지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탑리 삼층석탑은 화개우체국 남편에 있던 봉상사(奉常寺) 터 주변에 무너져 흩어져 있던 것을 1968년 이곳으로 옮겨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탑리 삼층석탑은 신라 삼층석탑의 기본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가 1층으로 줄어들고, 탑신부의 1층 몸돌이 다른 층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점 등으로 보아 통일 신라 말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탑리 삼층석탑은 전체의 높이가 4.5m이고, 단층으로 된 기단부의 중석(中石) 받침이 2단이며, 중석은 하나의 돌에 각 면 중앙에 탱주(撑柱)[부조된 가운데 기둥]를 양각하였다. 탑신부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1층이 훨씬 크며, 1층에만 2단으로 된 탑신 받침이 있다. 상륜부(相輪部)[탑두부]는 노반(露盤)만 남고 그 이상은 없어졌다.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이명산 석불사지]
이명산(理名山) 석불사지(石佛寺址)는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직전리 산 74-1번지 이명산에 위치한다. 석불사는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던 절로 생각된다. 그 시기는 정확히 한정할 수 없으나 이명산 마애석조여래좌상(理明山磨崖石造如來坐像)의 조성 연대가 통일 신라 시대의 아미타 신앙의 유행과 관련해서 생각한다면 8세기 중엽 전후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겠다. 폐사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명산 마애불은 10m 이상의 자연 암벽이 층계를 이루면서 크게 움푹 들어간 부분의 한 바위 면을 잘 다듬어 마애불을 조각하였다. 그런데 마애불이 조각된 부분의 바위 면까지 층리와 박리가 점점 진행되고 있어 마애불 보존이 심각한 위기에 놓여 있다. 머리는 소발(素髮)[민머리]이며, 육계(肉髻)[정수리 부분의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는 크고 높다. 얼굴은 크고 둥글며 풍만한 편이나 세세한 부분은 닳아 없어져 분명하지 않지만 두툼한 턱, 가늘게 뜬 눈, 꼭 다운 입 등에서 매우 근엄한 표정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몸통은 얼굴에 비해서 얕게 새긴 탓도 있지만 비교적 치졸한 편이다. 마애불의 수인은 오른 손을 들어 올리고 왼손은 팔을 굽혀 무릎 위에 올려놓은 형태이다. 대좌는 마멸되어 분명하지 않다. 수인으로 보아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의 구품정인(九品定印)의 하나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마애불은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아미타여래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옷 주름은 신체 전반에 걸쳐 얕은 선으로 새겼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 신라 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진교리 삼층석탑은 그 정확한 이름을 이명산 석불사지 삼층석탑으로 고쳐야 할 것이다. 진교리 삼층석탑은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면 진교리 진교면사무소 내에 있다. 원래 이명산(理明山) 석불사지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0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라고 한다. 진교리 삼층석탑은 소규모로서 삼층석탑의 기본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하층 기단부가 지나치게 넓어 균형미는 부족하다. 탑신부의 몸돌은 옥개석(屋蓋石)[지붕돌]에 비해 높아서, 높고 날렵한 느낌을 준다. 전체 높이는 3.5m이며, 고려 시대 초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룡리 사지]
청룡리 사지는 하동 청룡리 석불좌상에서 유추한다면,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 마을 앞 들판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룡리 사지에 존재했던 절에 봉안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동 청룡리 석불좌상은 속칭 ‘우마니들’, ‘우마니(牛滿) 절터’라고 불리는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 청룡마을 앞 들판에서 발견된 불상이다. 제작 기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4년 시장 개설을 위해 공사하던 중 석불이 발견되었는데, 주민들이 뜻을 모아 지금의 우체국 뜰에 이전하고 보호각을 지어 현재의 상태로 보존하고 있다.
하동 청룡리 석불좌상은 좌불(坐佛)로서 크기는 높이 107㎝, 어깨높이 69㎝, 폭 97㎝이다. 머리는 소발을 하고 있으나 훼손이 심하고 얼굴도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목은 삼도(三道)가 뚜렷하나 옷주름[天衣]의 표현도 마모되었을지 모르지만 그리 뚜렷하지 않다. 수인(手印)은 하품상생인(下品上生印)의 모양이지만 팔을 무릎 아래로 지향하고 있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겸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기교가 없이 소박하게 표현되었으나, 불상의 체격을 통통하게 조성하여 여유감을 느끼게 한다. 좌대(座臺)가 유실되어 조성 시기를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전체적인 형상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기타]
금오산의 마애불이 있는 곳에 존재했던 사찰은 사명이 전하고 있지 않으나 마애불의 존재에서 볼 때 고려 후기 이전에 창건되어 일찍이 폐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동 금오산 마애불은 남해대교 북쪽인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산 100-3번지 금오산[850m] 정상에서 서남쪽 800m 지점 너럭바위 지대의 거대한 ㄱ자형 암벽에 선각(線刻)한 마애불 좌상(磨崖佛坐像)이다.
하동 금오산 마애불은 부분적으로 훼손되었지만 전체적인 윤곽이 잘 드러나 있고, 구름을 타고 달을 업은 채 하늘을 나는 형상의 결가부좌를 하고 있다. 부처의 상호(相好)[얼굴 모습]는 타원형으로 풍만하지만 손상으로 자세한 표정을 알 수 없으나 목에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법의(法衣)[옷자락]는 통견(通肩)[불상이나 승려의 옷 모양새가 양 어깨를 모두 덮은 경우를 말함]이나 윤곽이 뚜렷하지 않고, 광배는 원형의 이중 광배로서 거신광(擧身光)이나 아무런 무늬가 없다. 수인(手印)[손 모양]은 지권인(智拳印)[주먹을 쥔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안은 모양]으로 추정되며, 불상 옆에 선각한 구층 석탑이 있어 특이하다.
하동 금오산 마애불은 정교하고 치밀하게 선각한 것은 아니지만 단정하고 근엄한 인상에 약간 길어진 상체와 신체 각부의 비례가 비교적 적절한 점 등 전체적인 부처의 모습에서 보면 고려 시대 후반기 양식을 반영한 불상으로 보고 있다. 특히 불상 옆에 선각한 구층 석탑이 있어 특이하다. 1993년 1월 8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90호로 지정되었으며 남해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이는 금오산 정상 남서쪽 너럭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 시대 후반기 지역의 불교 신앙생활을 엿볼 수 있는 주요한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정서리 석조여래입상은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 산 98-5번지 강선암에 있는 고려 시대 석조 여래 입상이다. 정서리 석조여래입상은 현재의 강선암 근처에서 옮겨온 것으로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정서리에 사찰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단서이다. 정서리 석조여래입상은 불신과 광배 및 대좌가 하나의 돌에 조각되었다. 비록 본래의 양손이 없어졌을지라도 거의 완전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전체 높이는 255㎝, 불상 높이는 190㎝이다. 본래의 수인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으로 생각되며, 소발에 육계가 높게 표현되고, 길고 가는 눈에 작은 입술은 미소를 띠고 있으며, 양 귀가 길게 늘어져 있는 모양이다.
또한 목과 턱의 삼도(三道)는 풍만한 편이다. 통견에 옷 주름이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광배(光背)는 끝이 둥근 반원형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도드라지게 선각하여 구분했을 뿐 아무런 무늬도 없다. 대좌(臺座)는 상중하로 이루어졌는데, 반원형의 상대석은 높이 24㎝, 지름 85㎝ 크기의 11복엽의 앙련과 이를 받친 단엽의 화반(花盤) 형태이다. 하대석은 일부가 땅속에 묻힌 사각형이다.
정서리 석조여래입상은 하나의 돌에 조각된 것으로서 불신을 균형 있게 표현한 것이나 단아하고 탄력 있는 양감 등에서 보면 신라의 특징이 드러나지만 소발, 높게 표현된 육계와 길고 가는 눈, 그리고 작은 입술에서 보면 고려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