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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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浩鎔 |
영어음역 | Jeong Hoyong |
이칭/별칭 | 학연(學然),만초(晩樵)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병철 |
출생 시기/일시 | 18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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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03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연일(延日) |
대표 관직 | 시종원우시어 |
[정의]
개항기 하동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학연(學然), 호는 만초(晩樵). 고조할아버지는 청계(淸溪) 정국제(鄭國濟)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통덕랑 정현채(鄭顯采)이며, 할아버지는 증조봉대부 동몽교관(贈朝奉大夫童蒙敎官) 정환우(鄭煥愚)이다. 아버지는 옥초(玉樵) 정철기(鄭喆基)[1842~1916]이며, 숙부는 수재(守齋) 정봉기(鄭鳳基)[1861~1915]이다.
아버지 정철기의 자는 응현(應賢)이며, 호는 옥초이다. 1861년(철종 12) 진주 농민 항쟁이 일어나 진주 병영(兵營)의 부고(府庫)가 비자, 정철기가 쌀 1,000석의 대가(代價)를 바쳤다. 이에 본영(本營)에서는 ‘연일정씨의창(延日鄭氏義倉)’이라는 여섯 글자를 부고의 문밖에 붙여 놓았으며, 조정에서는 선공감 가감역관에 제수하였다.
[활동 사항]
정호용(鄭浩鎔)[1864~1903]은 무과에 급제하여 장위영(壯衛營) 참군(參軍)에 기용되었다가, 얼마 후 시종원 우시어(侍從院右侍御)로 승진하였다. 1894년(고종 31) 왜병이 대궐을 침범하자 선전관청 선전관 윤영선(尹映宣)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곧장 궁으로 달려가 왕의 안위를 살폈다. 이에 동료들이 그를 존경하고 중하게 여겼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