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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청학동일기」[김성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68
한자 遊靑鶴洞日記-金成烈-
영어의미역 Record of Sightseeing at Cheonghakdong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강정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846년연표보기
저자 몰년 시기/일시 1919년연표보기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884년연표보기
배경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지도보기
성격 한문학|유람록
작가 김성렬(金成烈)[1846~1919]

[정의]

1884년 겸산 김성렬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불일암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유청학동일기(遊靑鶴洞日記)」김성렬(金成烈)[1846~1919]의 『겸산집(兼山集)』 권4에 수록되어 있다. 김성렬은 1884년(고종 21) 5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였다. 1877년(고종 14) 가을에도 하동군의 청학동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쌍계사(雙磎寺)칠불암(七佛庵) 일대까지만 둘러보고 불일암(佛日庵)까지 오르지는 못하였다.

김성렬의 자는 원중(源仲), 호는 겸산(兼山),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김성렬의 선대인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이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남원에 은거하였다. 1903년(고종 40) 천거되어 숭혜전참봉(崇惠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당시 나라가 적신(賊臣)들이 국정을 천단할 때이므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나라의 폐단을 조목조목 지적한 글을 올려 우국충정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1906년(고종 43) 을사오적의 참수를 주장하였다. 저술로 『겸산집』이 있다.

[구성]

김성렬은 고향인 남원 분동을 출발하여 쌍계사환학대(喚鶴臺)불일암불일폭포칠불암→구례를 거쳐 귀가하는 일정으로 유람하였다. 동행은 이사원(李士元)과 권술지(權述之)이다. 하동군의 청학동이라 일컬어지는 불일암 일대를 유람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불일암 주변에 대해서는 유람 일정에 따라 유람지에 대한 설명과 감상을 세세히 표현한 반면, 여타 쌍계사칠불암에 대해서는 이전 유람에서 익히 본 것이라며 매우 소략하게 적고 있다. 글의 전개상 5월 3일~5월 4일 양일간의 기록이 없다. 5월 2일 일정 이후 곧장 5일 단오가 나타나는데, 기록자의 착오인지 문집 발간 시 누락된 것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내용]

당시에는 하동군의 청학동에 대해 잡다한 설이 분분하고 잘못 전해진 말들도 무성하여, 심지어는 “청학동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폭포 아래에서 도롱이를 입고 석문을 밀치고 들어가면 그 형상이 호리병 속과 같은 별천지가 나타난다. 둘레가 40여 리쯤 되는 좋은 밭과 기름진 들판이 있어 수 천여 호는 살 수 있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김성렬청학동에 대한 ‘설’을 믿지 않았고, 자신이 직접 이런 말들의 황당함을 증명해 보고자 하동군의 청학동 유람을 나섰다.

김성렬 일행은 하동군의 화개동 입구에 도착해 먼저 불일암까지의 길을 확인하였는데, 당시의 지명이 허목(許穆)[1595~1682]의 「지리산청학동기(智異山靑鶴洞)」의 기록과 정확히 합치됨을 알고는 이번에야말로 청학동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에 부풀었다.

김성렬불일암 뒤쪽으로 불일상대(佛日上臺)와 불일중대(佛日中臺) 및 불일하대(佛日下臺)까지 두루 구경하고는 그 어느 곳도 청학동이 아니라고 확신하였다. 그런데 쌍계사로 돌아와 옥천평(玉泉坪)에 올라서서 주위 경관을 조망한 후 김성렬은 옛 사람들이 말한 청학동은 바로 이곳이라 하였다. 옥천평은 현 쌍계사 경내에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이 모셔져 있는 금당(金堂) 터를 가리킨다.

김성렬은 “옥천평은 응봉(鷹峯) 밑에 있다. 응봉과 옥천평 사이에 상대·중대·하대 3대가 있고, 백운산(白雲山)의 세 봉우리가 바깥 안산(案山)이 된다. 연수석정(延壽石井)은 중대에 있었다. 그 지세가 탁 트이고 산의 형세는 단정하고 수려하여 수 천여 호가 거주할 만하였다. 안으로는 무릉도원의 빼어난 모습이 있고, 밖으로는 성읍(城邑)의 번화함이 있었다.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 놓아 사람 사는 곳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으며, 깊고 광활하니 참으로 기이한 절경이었다. 나의 천견(淺見)으로 헤아려 본다면 옛 사람들이 청학동이라 말하는 곳이 여기인 듯하다”라고 하였다. 김성렬 역시 쌍계사불일암 일대를 하동군의 청학동으로 인식하였던 듯하다.

[의의와 평가]

「유청학동일기」는 하동 쌍계사불일암을 중심으로 구한말 유학자의 하동 청학동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며, 19세기 몇 안 되는 호남 학자의 청학동 유람록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한편 하동군 청학동의 청학에 대한 색다른 일화가 전해지고 있어 주목해 볼 만하다. 이는 김성렬이 목동촌(木洞村)을 지날 때 나무꾼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시골 사람이 10여 년 전 밭을 개간하다 돌 2개를 얻었는데, 백학(白鶴)과 청학(靑鶴)의 모습이었다. 청학은 작은 돌 3개를 품고 있어 마치 새끼를 안고 있는 모양이었다. 백학은 그대로 밭에 묻어 두고, 청학 바위와 새끼 학 돌은 시골의 아이가 가져갔는데, 이후 그 행방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마을 형편이 점점 나빠졌다고 한다. 이는 하동군의 청학동 관련 구비 전승 및 설화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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