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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기」[김도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471
한자 南遊記-金道洙-
영어의미역 Record of Sightseeing at South regio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강정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699년연표보기
저자 몰년 시기/일시 1733년연표보기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27년연표보기
배경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운수리·범왕리 일대지도보기
성격 한문학|유람록
작가 김도수(金道洙)[1699~1733]

[정의]

1727년 춘주 김도수가 경상남도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유람록.

[개설]

「남유기(南遊記)」김도수(金道洙)[1699~1733]의 『춘주유고(春洲遺稿)』 권2에 수록되어 있다. 김도수는 1727년(영조 3) 9월 12일부터 10월 5일까지 23일 동안 하동군의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고, 합천 해인사로 길을 잡아 그 일대를 두루 둘러보았다. 이어 충청도 화양동(華陽洞)에 들러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유적지를 구경한 후 서울로 귀가하였다.

김도수는 금산군수(錦山郡守)로 재직하던 중 관직을 그만두고 곧장 유람길에 올랐는데, 하동군 청학동 유람의 구체적인 일정만을 살펴보면 금산을 출발하여 순창→곡성→구례→화개→쌍계사(雙磎寺)불일암(佛日庵)청학동→신흥동→칠불사(七佛寺)삽암(鈒巖)→악양→하동을 거쳐 진주로 길을 잡았다. 동행은 김옥성(金玉聲), 양경조(梁慶祚), 김준필(金俊弼)이다.

김도수의 자는 사원(士源), 호는 춘주(春洲),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조부인 김우명(金佑明)[1619~1675]은 현종의 장인으로,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 같은 서인(西人)이었으나, 민신(閔愼)의 대부복상(代父服喪) 문제를 계기로 남인 허적(許積)[1610~1680]에 동조하였다. 그 뒤 남인 윤휴(尹鑴)[1617~1680] 등과 알력이 심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두문불출하였다.

김도수는 음보(蔭補)로 금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홍세태(洪世泰)[1653~1725], 정래교(鄭來僑) 등의 위항시인(委巷詩人), 노론의 유척기(兪拓基)[1691~1767], 남인의 채팽윤(蔡彭胤), 소론의 이덕수(李德壽)[1673~1744], 그리고 승려에 이르기까지 신분이나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교유하였다. 저서로 『춘추유고』가 있다.

[구성]

일정에 따른 산문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특히 유람 도중 접하는 명승의 유래와 역사적 상황, 유람자에 의해 표출되는 현지 상황, 주변 경관의 묘사 등 세밀한 표현력이 돋보인다.

[내용]

과거 선현들의 유람관은 문사들의 문장력과 학문적 성취에 절대적인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수많은 선현들이 전국의 명승을 찾아 유람을 떠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김도수 또한 이러한 인식하에 동쪽으로 설악산[1,708m]과 금강산[1,638m]을 유람하였고,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마니산[469m]에 올랐으며, 남쪽으로는 무등산과 월출산[809m]을 구경하였다. 이번 일정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거행된다고 유람 동기를 언급하였다.

구례 화엄사에 이를 무렵 한 무리의 활을 멘 병사들이 떼 지어 있었는데, 깃발과 무기가 찬란하였다. 이를 보고서 “우리 백성의 고통과 신음은 오로지 고관대작이 발톱으로 할퀴고 이빨로 물어뜯는 데에서 연유하니, 지금 저기 달려오는 자는 과연 발톱과 어금니가 없는 사람일까”라고 하였다.

쌍계사의 노승이 관아에 종이를 바치는 일이 번거롭고 힘들어 승려들이 살 수가 없다고 하소연하자 “성덕과 인정이 많은 성군께서 계신데, 하늘의 은택이 그친 것이 이처럼 심하여 산속의 동물들이 사는 것조차 불안하게 하였으니, 아래 사람들이 잔인하고 포악한 정치를 하여 하늘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운수행각(雲水行脚)하는 중들도 오히려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데, 하물며 몹시 곤궁하여 의지할 곳 없는 우리 백성들에게 있었으랴”라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안타까워하는 치자(治者)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남유기」를 통하여 하동과 관련한 여러 사실을 알 수 있다. 쌍계사에서 불일암을 오르는 길은 호랑이도 출몰할 만큼 험준하였다. 실제로 김도수쌍계사로 돌아 내려올 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한 무더기의 호랑이 똥을 보았다고 하였으며, 따라오던 승려들이 쌍각을 불어 호랑이의 접근을 막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하동군의 청학동과 신흥동 경관의 우열을 묻는 승려에게 “신흥동의 넓고 시원함과 청학동의 깊고 그윽함은 각각 장단점이 있네. 나로 하여금 바람을 쏘이고 달을 희롱하며 돌아가는 것을 잊게 하는 곳은 신흥동일세. 청학동은 뼈에 사무치도록 쓸쓸하니 돌부처가 아니면 살 수 없다네”라고 한 답변은, 하동의 최고 명승이라 일컬어지던 하동군의 청학동와 신흥동 경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라 할 수 있겠다.

[특징]

유람 상황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예를 들어 유람 도중 따 먹은 홍시는 달고 맛있었고 돌배는 맛이 시어 먹을 수 없었지만 이 또한 산중의 별미라 기록한 것이나, 불일암을 오르는 도중에 호랑이 똥을 보고서 기겁한 것, 오르내릴 때 쌍각을 불어 호랑이의 접근을 막은 점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작자의 탁월한 문장력이 더해져 독자가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게 이끈다.

[의의와 평가]

기행 문학을 내용 면에서 살펴보면, 산수 자연을 찾는 유람 기행 또는 관유(觀遊) 기행, 외국에 사신으로 가거나 따라간 기록인 사행(使行) 기행, 그리고 유배 기행과 피난 기행 등이 있으며, 이런 유형의 작품은 각각의 특징을 지닌다. 김도수의 경우 지방의 벼슬직을 그만두고 귀향하는 과정을 유람 일정으로 삼은 것으로, 이 또한 관유 기행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남유기」는 18세기 서인계 관료 지식인의 산수 인식과 시정(時政) 비판에 대해 알 수 있게 한다. 18세기에 나타나는 지리산[1,915m] 유람록은 주로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지리산[1,915m] 인근에 은거하던 몇몇 인물에게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는 당시 정치권력에서 밀려난 지식인으로서의 불만을 해소하거나 유람 도중 인근의 벗이나 동지를 찾아 위로받기 위한 목적이 강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김도수「남유기」는 연구 가치를 지닌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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