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6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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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外勢侵略-安山- |
영어의미역 | The Invasions of Foreign Power and The Islands of Ansa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정진각 |
[개설]
경기도 안산 앞바다의 섬들은 바닷길을 이용하여 중국에서 우리나라 중부, 곧 평택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지역이다. 또한 남해에서 서해를 거쳐 서울로 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중요한 곳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풍도 앞바다는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이 정박하기에 좋을 뿐만 아니라, 충청도 서산과 당진, 경기도 평택, 중국과의 항로를 사방으로 감시하기 좋은 곳이라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다. 오늘날도 인천에서 영흥도 대부도를 거쳐 풍도로 가는 항로는 대형 선박이 다닐 수 있는 ‘본선’이란 항로로 이용되고 있다.
[외세 침략의 길목이 된 안산 앞바다]
안산 앞바다는 삼국시대부터 매우 중요한 뱃길이었다. 신라와 동맹을 맺은 당나라는 백제를 공략하기 위하여 덕적도를 거쳐 풍도에 배를 정박했는데, 이는 오늘날 「소정방이 풍도에 심은 은행나무」라는 전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에는 대부도 주민이 몽고군에 쫓기던 삼별초를 도와 항거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1866년 병인사옥(丙寅邪獄)으로 희생당한 프랑스 신부에 대한 복수를 위해 우리나라를 침략한 프랑스 함대가 풍도(楓島)에서 처음 목격되었다. 『고종실록(高宗實錄)』 1866년 9월 12일자 기록에 의하면 공충도수사 임상준이 “이양선 11척이 풍도 앞바다를 향해 갔다.”는 보고를 올렸다고 되어 있다. 프랑스 함대는 9월 18일 서울 근교 양화진(楊花津)과 서강(西江) 일대에 진출했다가 돌아간 뒤 다시 10월 14일 강화도를 점령하여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다.
1871년 4월 6일에는 대동강에서 소실된 미국 선적 제너럴셔먼 호에 대한 보복을 위해 온 미국 함대가 풍도에서 처음 목격되었다. 이때 수원유수 신석희(申錫禧)가, “이달 3일 유시(酉時)쯤에 이양선(異樣船) 5척이 풍도의 뒷바다 북쪽 남양(南陽) 경계에 정박하였습니다.” 또, “5일 신시(申時) 쯤에 이양선 4척이 남쪽 바다 도리도(挑李島) 안에 와서 섰습니다. 이 섬은 풍도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감시를 따로 하여야 합니다.”라는 보고를 조정에 올렸다. 안산 앞바다에서 외국 군함이 목격된 후 보름 뒤, 역시 강화도에서 미군과 조선군의 전투가 벌어졌으니 이것이 곧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 세력의 공격을 받은 양요(洋擾)는 모두 풍도 앞바다를 지나가며 정박한 군함들에 의해 일어났다.
서양 세력과 두 차례의 전쟁을 치른 조선 정부는 안산 앞바다의 섬들에 대한 경비를 강화하게 된다. 1871년 6월 7일자 『고종실록』에 의하면 “삼군부(三軍府)에서 아뢰기를, 대부도는 방금 진영(陣營)을 설치하였습니다. 본도(本島)의 지계(地界)가 50~60리 정도에 불과하니 여러 섬들을 부속시킨 다음에라야 진영으로서의 모양을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근방의 영흥도·선재도(仙才島)·풍도(楓島)·선감도(仙甘島)·탄매도(炭埋島)·불도(佛島) 등의 전결(田結)과 호구(戶口)를 모두 해진(該鎭)으로 이속(移屬)시키고 그 장적(帳籍)의 마감(磨勘)도 본진에서 주관해야 할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단속하여 더욱 방수(防守)에 힘쓰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이 지역의 경계를 강화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본의 침략과 풍도]
19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안산 앞바다는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일본의 표적이 되었다. 일본은 대부도 앞의 조그마한 섬 풍도가 서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동학농민전쟁을 수습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따라 일본도 10년 전에 맺은 천진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사태가 진전되자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화약(和約)을 맺고 정전(停戰) 상태에 들어간 뒤 청·일 양군의 철병을 요청했지만, 청·일 양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조선 내에서 청·일 양국의 대립은 격화되어 갔다.
1894년 7월 청나라 군함은 군사를 실은 채 수심이 깊은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면서 동학농민전쟁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조선 내에서 청나라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일본은 청나라를 선제공격하기 위하여 25일 이른 새벽 기습작전을 시도하여, 청나라 군함 고승호(高陞號)를 침몰시키고 청일전쟁의 기선을 잡았다. 이때부터 일본의 기록에는 ‘풍도(楓島)’가 아닌 ‘풍도(豊島)’로 표기되기 시작한다.
당시까지 동양의 강대국이라 인식되던 청나라 함대를 풍도 앞바다에서 궤멸시킨 일본은, 대륙에 진출하여 대제국(大帝國)을 건설하겠다는 허망한 꿈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지금도 일본 근대사의 첫 페이지에서 자랑스럽게 다루고 있는 ‘풍도충해전(豊島沖海戰)’을 계기로 우리나라 서해안의 재해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러일전쟁 때도 안산 앞바다를 교두보로 하여 여순항을 공격하였는데, 이렇듯 안산 앞바다의 섬은 동북아 진출에 있어 중요한 전략적 교두보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제강점기 선감도]
1923년 일본은 「조선감화령(朝鮮感化令)」을 발표하고, 감화원(感化院)으로 함경남도 영흥에 조선총독부 직속의 영흥학교(永興學校)를 설치하여 이듬해 10월 1일 개교하였다 여기에서는 ‘8세에서 18세의 소년으로 불량 행위를 하거나 불량 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자’를 감화시킨다는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감화원에서는 일반 학교와 마찬가지로 교과 수업을 함과 동시에 식민지 지배 정책에 순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일제의 수탈로 몰락하는 농민이 점차 늘어나고 이들이 도시의 빈민, 토막민으로 전락하면서 거리에서 유리걸식하는 아이들의 숫자도 점차 늘어만 갔다. 이에 일제는 1942년 감화령을 보다 강화시킨 「조선소년령(朝鮮少年令)」을 발표하면서 감화원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서울 근교에 추가로 감화원을 세우려고 했을 때 첫 번째 후보지로 꼽힌 곳이,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고양군의 일산역(一山驛)에서 5~6㎞ 떨어진 고양군 중면과 송포면에 걸친 수십만 평의 유수지대(游水地帶)였다. 그러나 홍수에 대비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무인도였던 굴업도(屈業島)가 두 번째 후보지로 선정되었으나, 인천에서 전용선으로 6시간이나 소요되고 물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역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후 부천군을 중심으로 감화원 설립의 최적지로 선정된 곳이 바로 안산의 선감도였다.
이때에는 이미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해 가는 시기로, 원생 들의 교육 역시 감화가 아닌 군사를 양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1942년 7월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소년계 판검사회의 서류철」에 의하면, 선감학원 등 감화원의 운영 취지는 “사회 반역아 등을 보호 육성하여 대동아전쟁의 전사로 일사순국(一死殉國)할 인적 자원을 늘리자”는 것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이들의 수용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고, 외부와 접촉이 불가능한 섬 지역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많은 인권 유린 사태가 일어났다. 자급자족이란 미명하에 어린 소년들은 무제한적인 노동을 강요당하였으며, 육지로의 탈출을 막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1943년 당시 초등학교 2학년 학생으로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서 2년여 동안 생활했던 이하라 히로미쓰[井原宏光]는 당시 학생들의 처참함을 직접 목격하고 이를 소설로 쓰기도 하였다. 그는 “당시 눈으로 보이는 육지는 불과 300여m 정도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썰물 때 많은 소년들이 탈출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살이 빨라 대부분 익사하거나 육지에 닿았다 하더라도 곧 잡혀 왔습니다. 물론 잡혀 와서는 지하실에 감금되어 잔혹한 체벌을 받았지요.”라고 회상하였다.
결국 소년들을 감화시킨다는 목적에서 출발한 선감학원은 실제적으로는 어린 소년들의 조선 독립 의지를 말살시키고, 나아가 전쟁의 소모품으로 이용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이러한 인권 사각 지대에서 탈출을 기도하다 죽거나, 구타로 인하여, 또 영양실조로 죽은 경우, 그리고 굶주림을 참다못해 초근목피(草根木皮)를 씹다가 독버섯류를 잘못 먹어 죽는 경우 등 수많은 어린 소년들이 희생되었고, 이들은 그대로 섬의 한 구석 야산에 내팽개치듯 매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1세기 안산의 섬이 갖는 의미]
서울과 가까운 바다 앞에 떠 있는 안산의 섬들은 역사적으로 많은 상처를 받았다. 시대에 따라 외세 침입의 통로로, 중국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식민지 지배정책의 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해방과 6·25전쟁을 치른 후 안산의 섬들은 한동안 세인들의 머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치욕적인 일제강점의 역사가 안산 앞바다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한국 근대사의 굴욕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현재 불리는 ‘풍도(豊島)’를 옛 ‘풍도(楓島)’로 환원하고 이곳에 동북아(東北亞)의 평화기념비를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20세기 말 중국이 개방되고 동구권이 붕괴되면서 안산의 섬들은 다시 강대국들의 관심 속으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제 우리는 서해의 요충지로, 동북아 진출의 교두보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안산의 섬들에 대해 관심을 집중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