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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A020102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오정각길 35[화정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신대광

너빌 마을 회관에서 북쪽 마하산 정상을 바라보며 작은 오솔길을 따라 계곡을 따라가면 가파른 산으로 올라가는 시작 지점, 곧 안산시 화정동 산58번지고송정(枯松亭)이 있다.

고송정은 세조 2년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다가 참화를 당한 김문기(金文起)의 손(孫)인 김충주(金忠柱)가 살던 자리이다. 김충주는 조부 김문기, 부친 김현석(金玄錫)이 참화를 당하자 밤중에 도성을 탈출하여 여려 곳을 전전하다 화정동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그는 풀을 엮어 집을 짓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스스로 호를 탄옹(炭翁)이라 칭하고 평생 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베옷에 평립을 쓰고 다녔다고 전한다.

그는 단종을 생각하며 단종의 묘소가 있는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하였으며, 조부와 부친이 비명에 간 것을 애통해 하여 눈물을 흘렸는데, 그의 이러한 눈물에 소나무마저 말라죽었다고 한다. 그 말라죽은 소나무가 있던 자리에 세운 것이 바로 고송정으로, 1827년(순조 27) 김문기의 9세손인 진사 김처일(金處一)이 지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고송정의 훼손이 심해지자 1992년에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송정시(枯松亭詩)』라는 문집에서 당시의 상황과 건물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정자 왼편에는 ‘탄옹고지(炭翁古址)’라고 암각한 바위가 있다. 마을 어른들은 그 자리가 바로 탄옹공이 집을 지어 살던 곳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대나무 숲으로 우거져 있어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대나무 숲을 자세히 살펴보면 뚜렷하게 새겨 놓은 네 글자를 확인할 수 있다.

고송정 주변에는 수령 5백 년 정도 된 느티나무 두 그루와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리고 고송정에서 동북 방향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자그마한 연못이 있다.

마을 어른들의 얘기로는 이 연못은 원래 우물이었다고 한다. 아마 집을 짓고 살면서 용수를 얻기 위해 샘을 판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고송정 앞으로는 널따랗게 논이 펼쳐져 있다.

고송정은 원래 정면 2칸, 측면 2칸의 굴도리집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었다. 1988년 3월 21일 경기도 기념물 제101호로 지정되었으나 세월이 흘러 정자가 노후화되자 1992년에 사업비 5,130만 원을 투입, 전면 중수하여 1995년 10월에 준공식을 거행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송정에서 조금 내려오면 북쪽 방향으로 산을 오르는 작은 길이 나오는데, 길 입구에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에는 ‘탄옹공묘 망월암입구(炭翁公墓望越岩入口)’라 적혀 있다. 그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탄옹공 김충주의 묘가 나오는데, 이곳은 너빌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앞이 탁 트인 곳이다.

그리고 묘 뒤편 산 정상 쪽으로 보면 망월암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그곳을 따라 한참을 오르다 보면 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진 곳이 나온다. 그리고 그곳의 작은 바위에 ‘망월암’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연권 전 통장은 망월암의 유래에 대해, “이곳에서 탄옹공 어른이 단종과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생각날 때마다 올라와서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곳이지,”라고 설명해 준다.

고송정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지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 사람들은 이곳의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으며, 평소에는 고송정 입구로 가는 길에 철제문을 만들어 놓아 차량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고 오로지 걸어서만 들어갈 수 있다. 아마도 그 길을 걷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라는 배려로 보인다.

고송정은 가을에 찾는 이들이 많다. 스산한 바람이 낙엽을 떨구고 그 낙엽을 밟을 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고송정을 찾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모양이다.

[정보제공]

  • •  김연권(남, 1929년생, 화정동 거주, 화정동 전 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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