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B01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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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 삼천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이현우 |
간혹 테미산으로도 불리지만 마을 사람들은 주로 재밋산이라고 한다. 산 정상이 움푹 파여 마치 사람 머리의 둘레[테미]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데 조희찬 옹에 따르면, 터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라고 해서 터미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터미산의 정상에 세워진 삼국시대 산성이 터미산성이다.
안산 지역의 삼국시대 유적 중 그 성격이 가장 분명한 것이 성의 터다. 현재까지 초지동, 일동, 반월동 등지에서 삼국시대의 성터가 조사되었다.
터미산성은 일동에 있는 성태산성과 마찬가지로 최근에 발견된 성으로, 서해안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성태산성과 마주하고 있으며, 두 성 사이의 거리는 대략 1.2㎞이다.
터미산성은 해발 158m의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빙 둘러 성을 쌓는 테뫼식 양식이다. 산성의 형태는 북쪽이 약간 튀어나온 반월형인데, 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돌을 쌓아 만든 석축성이다. 마을 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하여 석축을 쌓아 방어를 단단히 하였고, 마을의 반대쪽은 깎아지른 듯 경사가 급하여 자연히 방어가 되므로 성벽을 탄탄히 쌓지 않았다.
산의 정상부에는 물을 저장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폭 10m 가량의 구덩이가 확인되며, 남동쪽 아래 부분에는 비교적 평탄한 곳이 있어 이곳에 건물지가 있을 가능성이 있으나 유물은 수습되지 않았다. 터미산성의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유물이 출토된 것이 없어 시기를 파악하기 곤란하지만, 성태산성과의 연결성과 성태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이 6세기 중반의 신라시대 유물인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산 지역을 위시한 경기도 해안 지방은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로서 이 지역을 둘러싼 삼국간의 쟁탈전이 치열했던 곳이다. 또한 이 지역은 중국과의 교류 창구로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안산 지역의 성지는 대당 무역항인 당성과 연결망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며, 유사시에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중요한 길목에 봉수를 배치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산 지역의 성지들은 몇 곳을 제외하면 아직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아직 그 면모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터미산성을 재미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조희찬 옹은 오래전 마을 어르신들한테 들은 바로는, 과거에[정확한 시대는 알 수 없음] 산성을 사이에 두고 싸움[전투]이 벌어졌는데, 산성을 공략하는 쪽에서 화살을 쏘고 사다리를 걸면서 점령하려고 했으나 산성을 지키는 사람들이 큰 돌을 굴리고 돌멩이는 던져서 적들의 공격을 막아냈다고 한다. 이 싸움으로 재미를 보았기 때문에 ‘재미산성’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재미’를 고개의 끝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고갯마루 끝에 있는 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지금의 터미산성은 석축이 많이 허물어져 옛 모습을 찾기가 어려운데, 특히 마을 방면의 석축을 쌓은 돌들은 거의 유실되었다. 장동호 씨 외에 몇몇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이는 마을 사람들이 성벽을 쌓은 돌들을 하나 둘씩 가져다가 집을 짓는 주춧돌로 쓰거나, 밭의 경계를 쌓을 때 사용했기 때문이란다.
얼마 전까지도 마을 사람들은 갱지돌[주춧돌]에 쓸 만한 돌이 필요하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성벽을 허문 다음 큰 돌들을 발로 차서 아래로 굴렸다고 한다. 그럼 아래쪽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고 굴러 내려오는 돌을 조심스레 처리해서 사용했다고. 우물을 팔 때 우물 안에 쌓은 돌도 모두 잘 다듬어진 산성의 돌을 가져다 썼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예전에 아랫삼천리에서 우물을 팔 때 개흙이 나오고 선체(船體) 일부분으로 보이는 널빤지가 나왔다면서, 그러고 보면 오래 전에 삼천천을 따라 바닷물이 들어왔었다는 이야기가 맞는 듯하다고 입을 모은다.
우물을 팔 때 나온 선체 널빤지는 어디에 있느냐고 장동호 씨에게 물었더니, 마을 사람인 장양진 씨가 한동안 보관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대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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