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C010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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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원곡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민 |
한국의 신흥 도시 대부분이 그렇듯, 안산시에서 전통 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곳은 드물다. 특히 산천을 전부 밀어 평지로 만들어 그 위에 공장을 짓고 근로자와 그 가족들이 살 주택과 상점을 지은 반월공단 주위로 전통을 간직한 마을을 찾는 것은 더욱 힘들다.
지금의 국경없는 마을에서 거주하는 사람 중에 태생지가 이 마을인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있다면 1979년 지금의 이주민 단지가 조성되고, 이주민들이 입주한 뒤에 이곳에서 출생하였거나 혹은 이주민은 아니지만 부모가 이주민 단지의 택지를 구입하여 이사한 후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결국 지금의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반월공단 조성으로 인해 집과 토지를 수용당한 이주민이거나, 혹은 일반 단지 내 택지를 분양받아 집을 짓고 거주한 사람이거나, 그도 아니면 그 후에 이 마을로 이사 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원곡동 국경없는 마을은 공단 조성 전에는 대부분이 야트막한 구릉지였다. 이러한 지형은 1970년대 중반까지도 유지되었다. 구릉지의 대부분은 복숭아 과수원이었고, 그 외의 지역은 야산이었다. 마을의 서남쪽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오음방’이라 부르는 널따란 농토가 펼쳐져 있었다.
마을은 줄곧 백성말[백성 마을]로 불렸는데, 백성말로 불린 데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는, 유명한 풍수가가 마을 형국을 살펴보니 장차 백여 성씨가 모여 사는 마을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명이다. 다른 주장으로는 마을 들판에 가을에 수확을 해서 볏짚을 쌓았는데, 그 높이가 곡식 백 석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해서 백석말[백석 마을]로 불렸다는 것이다.
구릉성 산지와 오음방을 중심으로 비옥한 농토가 펼쳐졌던 이곳은 시간이 흐르면서 땅주인이 바뀐다. 조선 후기에는 윤씨 성을 가진 어느 판서의 소실이 집을 짓고 살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농토를 소작 주었다고 한다. 그 후 조선 말 이 땅은 배동혁이라는 서울에서 이름난 갑부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서울 부자 태양호라는 사람에게 넘어갔는데, 당시 그가 사들인 백석 마을 땅은 700석 가량 되었다고 한다.
당시 백석 마을 땅을 산 태양호 씨에게는 슬하에 일곱 남매가 있었는데, 그 중의 태응균[1935년생]이 1944년 군자면 원곡리 276번지로 이사를 왔다.
태응균은 아버지 태양호한테 물려받은 과수원에 복숭아를 심어 서울 시장에 내다 팔았는데, 그가 바로 백성 마을 최후의 거주자이다.
공단 조성으로 9.9174㏊ 가량 되는 토지가 수용되자 태응균은 지금의 이주민 단지로 이사하여 1990년대 초반까지 거주하였다. 지금은 역시 인근인 원곡2동의 아파트에서 계속해서 살고 있다. 평생을 원곡동에 산 셈이다.
한편 이곳에 이주한 주민들은 당시 안산의 선부동, 성곡동, 원시동, 신길동, 목내동, 원곡동에 거주하던 안산의 원주민이었다. 그들은 전에 대부분이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었지만, 지을 농토가 없어지자 대부분이 공단의 근로자나 안산시내의 건설 현장 잡부, 혹은 작은 상점을 차려 생계를 꾸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주한 주민들도 많은 수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이주택지[247.94㎡]를 정리하고 외지로 떠나게 되었다. 이주민의 또 다른 이주는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되어 당시 이주해 온 사람 중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은데, 원곡동 주택경로당에 가면 노인이 된 그분들을 뵐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원곡동은 끊임없이 그 주인이 바뀌는 진정한 이주민의 동네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