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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가 되고 나니 좋은 것도 많지만…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E010302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 종현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진호

시화방조제가 완공되면서 육지가 된 대부도 종현 마을 사람들의 생활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육지가 되기 전 종현 마을 사람들의 삶은 섬 사람 모습 그대로였다. 종현 마을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굴과 바지락 양식을 시작했는데 그 이전에는 농사와 연안어업에 종사했다.

어업은 배를 타고 나가는 어업과 얕은 바다에 그물을 치는 어살 등으로 나뉘는데, 종현 마을은 배를 타고 나가는 어업은 별로 하지 않았다. 배는 큰 것이 약 30t 정도로 연평도 근해까지 작업을 나가서 고기잡이와 새우젓 장사를 했으며, 작은 것은 약 2~3t 정도로 주로 근해에서 작업을 하였다. 배를 소유한 집은 마을 전체에서 8가구 정도였다고 한다.

배가 없는 사람들은 주로 농사를 짓거나 어살을 주로 하였고, 여자들은 갯벌에서 조개 채취를 주로 하였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들어 섬 전체가 굴과 바지락양식을 대대적으로 시작하면서 연안어업보다 안정적인 수입원인 굴과 바지락 양식에 전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화방조제가 완공되면서 어업 활동에 큰 변화가 생겼다. 방조제 건설 전에 갯벌은 마을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말 그대로 보물창고였다. 그런데 방조제 건설로 갯벌에서 채취하는 해산물의 양과 질이 급격하게 저하되었다.

방조제 건설이 대부도 지역 갯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아직 공식적으로 명확히 해명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대부도 갯벌이 망가진 원인을 대략 두 가지로 꼽고 있다.

첫째, 방조제 건설로 만들어진 시화호의 영향이다. 방조제 건설로 만들어진 거대한 시화호는 완성되자마자 수질이 급격하게 오염되어서 애초의 목적인 공업 용수나 농업 용수로의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정부에서는 시화호의 수질을 개선시킨다는 명목으로 시화호의 담수화를 포기하고 방조제의 갑문을 열어 바닷물과 섞어 버렸다.

이로 인해 시화호 수질은 개선되었지만 시화호의 썩은 물이 인근 바다로 흘러나와 해역을 오염시켰다. 그 결과 인근 해역의 어종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갯벌의 생태계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둘째, 시화방조제로 인한 인근 해역의 해류 변화이다. 마을 사람들이 바지락과 굴의 종패를 뿌리면 갯벌에 고정되어야 하는데 해류의 변화로 떠내려가 바지락과 굴이 자라지 않게 되었다. 즉 어장이 죽어 버리는 심각한 현상이 대부도와 화성 지역 일대에서 벌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바지락과 굴 어장은 물론이고 갯벌에서의 조개 채취가 불가능해진 지역이 대부도와 화성시 지역에 많이 생겼고, 생계가 끊길 지경에 몰린 다수의 어민들은 다른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어장의 폐쇄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정부로부터의 보상은 별로 받지 못하였고, 그나마 받은 보상금도 모두 국가에서 환수해 갔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보상금과 관련한 이야기를 자세히 묻자 대전의 수자원공사에 항의 시위를 간 이야기부터 차례차례 쏟아져 나왔다.

“하여튼 대전에 있는 수자원공사 본부까지 내려가서 데모를 했는데 뭘. 근데 보상은커녕 보상받은 걸 몽땅 회수해 갔어.”

“보상금을 처음 받았을 때는 마을별로 얼마씩 떨어지면 조합원 가구별로 똑같이 분배했어요. 한 900만 원 정도 받았는데 이자까지 1,000만 원 가까이 물어줬지. 그걸 안 갚을래야 안 갚을 수 없는 이유가 정부를 시켜서 농토를 압류시켰어. 그러니 내 땅을 풀려면 돈을 안 갚을 수가 없었지.”

“아, 저 아래 어디인가는 보상을 안 받고도 공사를 했다네. 그러니까 우리만 보상해 줄 수 없다고 그래서 회수해 간 거야. 그래서 재판을 했는데 1심은 이겼는데 고등법원에서 졌지. 그래서 2001년부터 갚기 시작해서 2007년까지 물어 줬지. 어떻게 본인도 모르게 우리 땅을 강제로 압류를 했는데, 어떡해 물어야지.”

마을 사람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방조제 건설로 어장이 망가진 것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부분에 대한 원망이 가슴속 깊이 남아 있었다. 특히 정부가 보상금을 회수하기 위해 자신들의 땅을 가압류 한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재판에 졌으니 나라에서 하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보상금과 관련해서 마을 사람들이 당한 고통은 당시의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안산시 대부도 어민들이 재판을 통해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받았으나 상급심에서 패소, 이를 되갚느라 수년째 고통을 겪고 있다. 특히 사건담당 변호사는 법원의 승소사례금 반환 판결에도 불구, 이를 갚지 않아 어민들이 대신 갚고 있다.

18일 대부도 주민들에 따르면 대부도를 비롯, 안산·화성·시흥 지역에서 허가 없이 소형 어선으로 고기를 잡거나 바지락 등을 캐는 관행 어민들은 시화방조제 건설공사에도 불구, 보상 대상에서 제외돼 한국수자원공사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대부도의 종현, 선감, 영전 등 9개 어촌계 1천130가구 주민은 지난 93년 서울의 오모 변호사를 선임,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인 서울지법 남부지원은 지난 96년 7월 수자원공사 측에 대해 종현어촌계에 34억 원, 선감어촌계에 25억 8천만 원을 각각 지급하라고 판결했고 오 변호사는 성공사례금 명목으로 9개 어촌계에서 모두 50여억 원을 챙겼다고 주민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고법 항소심에서 종현·선감어촌계는 잇따라 패소하고 대법원에서 패소가 확정, 종현어촌계는 2년치 보상금을 제외한 14억 8천800만 원을, 선감어촌계는 16억 8천600만 원을 수공 측에 돌려주게 됐다.

그러나 지급받은 보상금을 이미 생계비나 영농비 등으로 써버린 주민들은 목돈을 갚을 길이 없게 되자 대부분 전답을 압류당했고 1심 승소 후 거액의 성공보수금을 챙긴 오 변호사는 패소 후 한 푼도 반환하지 않아 주민들이 변호사가 챙긴 돈까지 대신 갚고 있는 실정이다. 주민들은 “오 변호사는 1차 승소 후 생계비 지원 명목으로 가지급금을 나눠 준 뒤 자신도 거액을 챙겼다”며 “법원에서 패소했으면 당연히 돈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했다.[『경인일보』 2004. 5. 19]

위의 기사를 보면, 마을 사람들의 주장이 대부분 사실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지급받은 보상금을 생계비와 영농비 등으로 써버린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전답을 압류하고 이자까지 쳐서 매년 받아간 수자원공사에 대한 주민들의 분노를 이해할 만했다. 평생 생계를 이어가던 터전이 사라진 것에 대한 보잘것없는 보상금마저 도로 빼앗긴 종현마을 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육지와 떨어진 섬에서는 육지로 나가는 일이 힘들다. 따라서 육지와는 고립된 생활양식을 보이며,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배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그러나 육지와 연결된 이후에는 이러한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마을 어른들에게 방조제가 생긴다고 했을 때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 묻자 다들 좋아했다고 말했다.

“아, 다 좋다고 했지. 섬이 육지가 되니까. 배타고 다니는 거에 비해. 처음에는 배도 진두에서 다녔는데 진두를 포기하고 방아머리로 다녔지. 진두는 조금 때에는 배가 닿기가 어렵다고. 그래서 방아머리로 다녔지. 게다가 가깝고.”

방조제가 생긴 후 마을 사람들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묻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방조제 막기 전에는 고기 잡는 배도 많았고 짐배도 많았지. 방조제 막히니까 짐배가 필요가 없잖아. 다 차로 실어 나르니까. 고기배도 고기가 자꾸 죽어 없어지니까 점점 줄어들었지. 지금은 영흥까지 차가 들어가니까 뭐. 요 앞으로 지나가는 화물차들은 모두 영흥 가는 차들이에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육지가 되기 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진두[현 신당리]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다녔음을 알 수 있다. 종현마을에서 진두까지 가는 길은 해방 직후 대부도의 초대 면장이던 김한수 면장이 닦았다고 한다.

그러나 진두는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배를 대기가 어려워, 1960년대 이후 방아머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다녔다.

그때는 인천과 대부도가 배로 왕래할 수 있는 1일 생활권이어서 생활의 중심이 인천과 연결되었다. 지금도 종현 마을 젊은 사람들 중에 인천으로 나가서 사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과거에는 같은 생활권이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지금은 인천보다 안산및 시흥과의 교류가 활발해져서 과거처럼 인천에 속해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보제공]

  • •  김복동(남, 1936년생, 대부북동 거주, 종현마을노인회장)
  • •  홍성웅(남, 1941년생, 대부북동 거주, 전 대부면 부면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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