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535
한자 雙磎寺羅漢殿
영어의미역 Nahanjeon Hall of Ssanggyesa Temple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곽승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01년연표보기
문화재 지정 일시 1974년 12월 28일연표보기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8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지도보기
성격 나한전
양식 2익공 맞배지붕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쌍계사
관리자 쌍계사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24호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지리산 쌍계사에 있는 조선 후기 건축물.

[개설]

지리산 쌍계사는 722년(성덕왕 21) 대비화상삼법화상이 세웠고, 처음에는 옥천사라 불렀다. 뒤에 정강왕[?~887]이 절 주변의 지형을 보고 두 개의 계곡이 만난다고 하여 쌍계사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것을 벽암선사가 1632년(인조 10)경에 터를 옮겨 새로 지은 건물이다. 쌍계사 나한전도 이때 중건된 이후 여러 번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치]

쌍계사 나한전지리산 쌍계사 경내의 쌍계사 대웅전 영역에 위치한다.

[변천]

쌍계사 나한전은 석가여래와 16나한상을 모신 법당으로 840년(문성왕 2)에 진감국사가 지었다고 하나 정확한 사실은 알기 어렵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 나한을 모시는 법당이 여러 사찰에 조성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적어도 고려 시대에는 지리산 쌍계사에 나한전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지리산 쌍계사를 중창할 때인 1641년(인조 19) 벽암선사가 응진당을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이 쌍계사 나한전의 전신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쌍계사 나한전은 1901년(고종 38) 쌍계사 대웅전과 더불어 단청불사가 이루어졌고, 1978년 고산선사에 의해 중수되었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의 3량 구조로 맞배지붕을 한 익공계 건물이며, 지붕 옆면에 풍판(風板)이 있다. 사찰 내의 쌍계사 명부전과 흡사하게 주두(柱頭)와 창방(昌枋) 위에 놓은 소로[小累]로서 방형의 주심첨차와 행공첨차를 받치고 있다. 익공의 형태는 출목이 있는 2익공 짜임으로 윗부분에는 연화무늬를 보머리에 끼워 장식하였고, 내부는 초익공과 2익공을 맞붙여 운공(雲工) 형태로 조각하였다.

기둥은 배흘림이 거의 없으며 높이가 낮고 가늘다. 주두(柱頭)는 기둥 윗부분 지름의 1.5배 정도로 매우 넓다. 내부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석가모니불 윗부분에는 장엄 장식이 얇고 긴 띠 모양의 판재를 하나 걸치고 휘장 모양의 단청으로 생략하였다. 쌍계사 나한전은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이어서 사용된 재료의 크기도 작으며 장식도 생략되어 있어, 부속된 법당의 격에 맞춘 것 같은 소박한 느낌을 준다.

[현황]

쌍계사 나한전은 석가모니불과 16나한(羅漢)을 두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봉안하고 좌우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입상을 두었고, 그 주위에 16나한상과 인왕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가섭존자상에서는 고승의 풍모가 느껴지고, 아난존자상은 지적이고 준수한 풍모를 잘 표현했다.

[의의와 평가]

대승경전에 따르면 나한은 무량한 공덕을 구비하여 삼계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교학에 뛰어난 자들이다. 신통력으로 스스로 수명을 늘려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이 세간에 머물며, 널리 참된 복전(福田)이 되라는 정법호지(正法護持)의 사명을 석존으로부터 위임받은 존재로 설명되고 있다. 이 같은 나한은 철저하게 수행 정진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종의 사상적 경향과 일치하여 사찰 내의 중심적인 신앙 공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은 고려 시대에 지성인들의 세계와 인생을 바라보는 인식 태도가 신앙의 전개에 영향을 주면서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나한신앙이 조선 시대에도 이어져 사찰의 주요 불전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유학자들도 점차 불교를 공부하여 교섭하는 측면을 부각시켰는데 지리산 쌍계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