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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697
한자 祠堂
영어의미역 Shrine
이칭/별칭 사우,사,사묘,각,영당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박용국

[정의]

경상남도 하동 지역에 있는 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집.

[개설]

사당(祠堂)은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을 말한다. 민간의 사당은 가묘(家廟)라고도 하며, 왕실의 것은 종묘(宗廟)라고 부른다. 사당은 사우(祠宇)·사(祠)·사묘(祠廟) 등으로 대체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드물게 각(閣)이라 하여 격조를 높이려는 예도 있으며, 신주 대신 영정을 모시고 있을 경우 영당(影堂)이라고도 하였다. 사당은 중국에서 비롯되고, 이미 삼국 시대에 도입되어 왕실에서는 묘(廟)를 세워 조상을 모셨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뿌리를 내리면서 사대부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조차 대청마루 한 모퉁이나 집의 적당한 곳에 신주를 모시고 받들었다. 대개 사당에는 3년 상을 마친 신주를 모시며, 집을 짓기 전에 먼저 지었다. 사당이 있는 집은 종자(宗子)가 대대로 지키고, 부득이 한 경우가 아니면 헐지 않았다. 위치는 정침(正寢) 동편에 3칸을 세우고, 앞에 문을 내었다. 문 밖에 각 3계단으로 된 2개의 계단을 만들어 동쪽을 조계(祚階), 서쪽을 서계(西階)라고 하였다.

사당 안에는 4감(龕)을 만들어 4대조를 봉안했다. 신주는 반드시 북단의 서쪽부터 제1감에 고조고비(高祖考妣), 제2감에 증조고비(曾祖考妣), 제3감에 조고비(祖考妣), 맨 끝인 동쪽 제4감에 고비(考妣) 순으로 모신다. 감 밖에는 장(帳)을 드리우고, 각 위패마다 제상(祭床)을 놓고 그 위에 촛대 1쌍씩을 놓는다. 최존위(最尊位) 앞에는 향상(香床)을 놓고, 서쪽에 향로, 동쪽에 향합을 올려놓는다. 사당은 담을 쌓아 가리며, 대문을 만들었다.

[유림 관련 사당]

1. 금천사(琴川祠)

금천사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덕은리 영당마을 682번지에 위치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 지냈던 사당이다. 금천사는 1824년(순조 24)에 건립하여 쌍계사에 모셨던 최치원의 영정을 모셔 왔으나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금천사는 현존하지 않는다. 최치원의 영정은 현재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운암영당에 안치되어 있다.

2. 존덕사(尊德祠)

존덕사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신촌마을 도로 좌측에 있는 마을 회관에서 약 300m 오르면 마을 끝부분 왼쪽에 위치한다.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1529~1590]의 자손 재실인 하동 북방리 수정당(河東北芳里守正堂)수우당 최영경의 제자인 석정(石亭) 정홍조(鄭弘祚)[1534~1590]를 위한 덕원서당(德源書堂)이 있다. 하동 북방리 수정당덕원서당도 같은 공간에 위치하고 있다. 존덕사는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死) 때 정철(鄭澈) 등 서인의 무고로 억울하게 죽은 수우당 최영경과 석정 정홍조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존덕사최영경과 정홍조의 높은 학덕과 선비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남 유림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仲丁日)에 채의(菜儀)를 봉행한다.

3. 운암영당(雲岩影堂)

운암영당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912-1번지에 위치한다. 운암영당은 신라 말기 유학자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최치원은 통일 신라 후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였으며, 6두품 출신의 지식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869년(경문왕 9) 당나라에 유학하여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여 황소의 난 때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크게 문명을 떨쳤던 인물이었으나 귀국 후 신라의 현실에 좌절한 나머지 해인사에 은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상은 처음에는 쌍계사에서 보존하다가 1825년(순조 25) 화개의 금천사로 옮겼고,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하동향교로 옮겨 한동안 보존하였다. 그 후 광천영당을 거쳐 1924년 운암영당으로 옮겨서 보존하고 있다.

4. 경충사(景忠祠)

경충사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821번지에 위치한다. 경천묘충의공 정기룡(鄭起龍)[1562~1622] 장군의 사당이다. 정기룡은 본관이 곤양(昆陽)이며, 호가 매헌(梅軒)이다. 정기룡은 무과에 등급한 뒤 임진왜란 당시 경상 우도방어사 조경(趙儆)이 적에게 포로로 잡힐 위기에 놓이자 단기(單騎)로 달려들어 구하여 명성을 얻었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 63전 63승의 장군으로서 수전의 이순신(李舜臣), 육전의 정기룡이라고 할 정도로 임진왜란 때 명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광해군 재위 시 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총관, 도총관, 삼도수군통제사를 거쳐 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으며, 통영 진중에서 죽었다. 경충사는 장군의 충의를 이어가고자 지방 선비와 후손이 1932년에 건립한 것으로 장군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5. 금남사(錦南祠)

금남사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107-1번지에 위치한다. 금남사목은 이색(李穡)[1328~1396]을 중심으로 수은당(樹隱堂) 김충한(金沖漢)양촌(陽村) 권근(權近)[1352~1409]을 함께 모신 사당이다. 이색은 고려 후기 문신으로서 포은 정몽주(鄭夢周), 야은 길재(吉再)와 함께 고려 후기의 대성리학자인 삼은(三隱) 중 한 사람이다. 저서로는 『목은문고(牧隱文藁)』,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권근이색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몽주 등과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여 조선 왕조의 유학계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저서로는 『양촌집(陽村集)』 40권이 있다. 금남사는 원래 1682년(숙종 8) 지방 유림들이 검남산 밑에 세웠으나 하동댐 건설로 1988년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6. 경현사(景賢祠)

경현사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296번지에 위치한다. 경현사는 조선 시대 무신인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1377~1438]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하경복은 1402년(태종 2)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병마사, 병마절제사가 되어 국방을 수비하였다. 15년 동안 국경 지대에서 여진족과 대치하며 경비에 철저했으며, 특히 1433년(세종 15) 정흠지(鄭欽之)·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계축진설(癸丑陣說)』을 펴내 군사 교육의 교재로 삼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활을 잘 쏘았으며, 개국 초기 철저히 국방을 지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경현사는 1784년(정조 10) 유림들이 세웠으며, 이곳에는 하경복을 대신해 노모를 모신 하경리(河敬履), 그를 이어 북방에서 여진족을 토벌한 그의 아들 강장공과 손자 경절공 하숙보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문중 관련 사당]

1. 두방영당(斗芳影堂)

두방영당은 진주 강씨 은열공파(殷烈公派) 파시조(派始祖)인 은열공 강민첨(姜民瞻)[963~1021]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고려 현종은열공이 독서를 하던 우방산(牛芳山)에 영당을 창건하고 은열공의 상을 봉안하였으며 위전(位田)을 두었다. 1352년(공민왕 원년) 9세손 충정공(忠貞公) 사공(司空)이 예를 좋아하여 우방사(牛芳祠)를 중수하고 이어 세사(歲祀)를 모셨다. 1777년(정조 원년) 4월 우방사에 있던 영정을 두방산(斗芳山)으로 옮겨 두방영당을 건립하였다. 이때 재사(齋舍)를 두방재(斗芳齋)라 하였으며, 문은 택류문(澤流門)이라 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89년(고종 26) 영당을 두방산의 옛터에 다시 세웠다. 1927년 8월 다시 중수를 하였는데, 설악 강수환이 영당 상량문을 지었다.

2. 경천묘(敬天廟)

경천묘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686번지에 위치한다. 경천묘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영정을 모시고 경주 김씨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서 신라의 국운이 끝났음을 알고 고려에 국권을 양도하였다. 영정의 제작 시기에 관해서는 세밀한 필치와 음영이 표현된 채색 등의 묘사 방식과 화풍으로 보아 1677년(숙종 3) 이후의 개모(改摸) 기록은 남아 전하고 있지 않지만 1677년 이후 다시 한 번 개모되었으나 개모된 어진은 소실되고, 이 어진은 19세기에 다시 한 번 더 개모된 것이라고 한다. 경천묘는 1902년에 건립되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988년에 하동댐 건설로 다시 옮긴 것이다. 경주 김씨 하동 종친회에서 소유·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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